용연서원

충숙공 학파 이선생 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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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숙공 이예선생 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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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연서원 龍淵書院 

울산광역시 남구 이휴정길 20


조선 태종때 명신(名臣)으로 학파(鶴坡) 이예(李藝)선생의 정성과 충절을 추모하기 위하여 영조13년 丁已(서기 1737년)에 용연사(龍淵祠)로 창건되었다가 서기 1782년에 석천리의 석계서원(石溪書院)으로 이건하였는데 고종5년 戊辰(서기1868년)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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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학성이씨월진문회에서 유림의 공의를 얻어 10억여원의 비용으로 용연사 옛터에 용연서원(龍淵書院)을 창건하였으니 처음 용연사를 세운 지 268년이 지난 신사년(서기2001년)에 복원되었다. 

1910년에 충숙(忠肅)이라는 시호를 받은 학파(鶴坡) 이예(李藝 : 1373~1445년) 선생은 학성이씨(鶴城李氏)의 시조로서 태종과 세종조에 사신으로 일본(日本), 유구(琉球), 대마도(對馬島) 등지에 전후 40여 차례나 왕래하면서 잡혀간 본국인을 돌아오게 한 인원만도 667명이었다. 또한 세종 己亥年(서기 1419년)에 이종무(李從茂)를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로 임명하여 대마도를 정벌할 때 이예 선생이 중군병마부수(中軍兵馬副帥)로 참전하여 혁혁한 공을 세운 공로로 세종 2년(서기1420년)에는 군기부정(軍器副正)으로 승진되었고, 다음해에는 공패(功牌)를 하사받았다. 


공(公)의 자(字)는 중유(仲游)요 호(號)는 학파(鶴坡)이고, 시호(諡號)는 충숙(忠肅)이시다. 관직(官職)은 자헌대부(資憲大夫) 지중추원사(知中樞院使)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을 지내시다가 세종27년 乙丑(서기1445년) 2월23일 73세로 졸(卒)하시다. 서원(書院)이 철폐(撤廢)된 지 130年이 지난 1998년 무인 2월 향유의 공의에 후손들이 숭조의 정신으로 황용연(黃龍淵)의 옛 유허(遺墟)에 서원(書院)의 예에 따라 세우기 시작하여 2001년 신사1월에 묘우와 강당, 동·서재 및 내·외삼문 등 용연서원(龍淵書院)을 완공하고, 같은 해 3월12일 묘우(廟宇)인 상충묘(尙忠廟)에 학파 이선생(鶴坡 李先生) 위패를 봉안(奉安)하여 낙성식(落成式)을 거행하고 3월 17일(음 2월 23일) 향사(享祀)를 봉행하였고 이어서 2004년 갑신 10월 16일 신도비(神道碑)를 제막하였다. 


부속건물로 내삼문(內三門)을 선인문(善仁門), 강당(講堂)은 양성당(養誠堂), 동재(東齋)는 명성재(明誠齋), 서재(西齋)는 온고제(溫古齋), 외삼문(外三門)은 추인문(追仁門)으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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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연사지龍淵祠址 와 이휴정二休亭


대개 나라와 사회에 크게 이바지하여 그 업적이 지대한 유현(儒賢)들을 숭모하고 사표(師表)하기 위하여 유림의 공의에 따라 서원(書院)을 세워 신위를 모시고 제향(祭享)함은 도의와 양속을 조성하여 유풍(儒風)의 본을 삼고자 함에 있었다. 


이러한 유풍(儒風) 세속(世俗)에 따라 용연서원(龍淵書院)은 국초 일본 등지에 외교 사신으로 40여회나 왕래하면서 국위를 선양하고 공을 세운 외교 명신 자헌대부 지중추원사 세자좌빈객을 지낸 학성이씨의 시조 학파(鶴坡) 이예(李藝) 선생을 모시기 위한 본향 유림들의 공의에 고을의 남쪽 십리 허에 있는 은월봉(隱月峰)아래 황용연(黃龍淵)의 언덕에 영조 13년 정사(1737년) 11月 16日 용연사(龍淵祠)를 창건하여 위판(位板)을 모시게 되었다. 


이 자리가 이동영(李東英)이 1662년당시 이미정(二美亭)을 축조했던 터로 1664년 직지사 박세연(朴世衍)이 래방하여 이휴(二休)라 부른데서 이휴정(二休亭)으로 고쳐졌고, 1727년 즈음에 이마저 소실되어 위와 같이 용연사를 세우는 동기가 되었다. 


용연사의 위판을 후손 현담(玄聃)이 써 모시고 정조 6년 임인(1782년)까지 45년 동안 유림 들과 후손들이 세일향(歲一享) 하다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석천리(石川里)로 옮기게 되었다. 그 후 62년이 지난 철종 11년 경신(1860년)에 도유(道儒)의 공의에 따라 서원으로 승원(昇院)되었다가 고종 5년 무진(1868년) 국령에 따라 석계서원(石溪書院)은 철폐되었다. 


이와 같이 용연사가 옮겨가고 기존의 이휴정과 용연사 터에 학성이씨 월진문회에서 학성관 남문루 해체 분을 매입하여 1940년 계해에 이건하여 이휴정을 세우게 된 것이다. 

지금은 용연사를 재창건한 용연서원이 이휴정과 함께 나란히 세워져 도심속의 명소로 자리 잡고 있다. 현재 용연서원 동재(東齋:明誠齋)에는 조선 최초 통신사 충숙공 이예(李藝)선생 홍보관, 서재(西齋:溫古齋)에는 국가민속문화재 제37호가 전시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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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진장학재단 댓글 0건 조회 2,450회 작성일 22-04-01 10:19